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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에세이35

불의 계절, 기도의 손 ■ 불의 계절, 기도의 손 김왕식 . 한 아이가 무릎 꿇는다.세상은 무너지고 있었다.정치의 혀는 서로를 찢으며,경제의 심장은 뿌리째 흔들려하루하루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시대.그리고 산불.산 하나가 타오르고,마을이 타고,사람들의 기억이 타고,마침내 하늘마저 붉게 물든다.모든 것이 타는 그 자리,모두가 등을 돌린 그 순간—그 소녀는, 한없이 작은 몸으로세상의 무게를 짊어진 듯조용히, 아주 조용히,두 손을 모아 무릎을 꿇었다.그 손엔 무엇이 들렸을까.검은 재를 움켜쥔 손바닥일까.부서진 희망을 꿰매려는 실밥일까.아니면, 단지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뜨거운 눈물 한 방울.. 2025. 4. 12.
고요를 낚는 사람 ■                      고요를 낚는 사람                                    김왕식  새벽은, 언제나 조용히 다가온다.숨결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낮게.세상의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 시간—누군가는, 낚시 도구를 챙긴다.조심스럽게.마치 마음을 꺼내듯, 주섬주섬.그것은 단지 물고기를 위한 채비가 아니다.어제의 소음을 벗고,오늘의 고요를 맞이하려는 의식이다.그는, 숲 속 저수지로 향한다.나무들은 잠든 듯 고요하고물은 속삭이는 듯 잔잔하다.그 사이를 천천히, 그는 걸어간다.낚싯대를 든 그의 모습은—자연 속에 스며든 한 줄기 호흡 같다.세상과 한 걸음 떨어진 곳.그곳에서 그는 세월을 낚고자 한다.낚싯대는 기다림의 언어이고무딘 바늘은, 삶의 흔적이다.날카로움은 닳아 .. 2025. 4. 12.
대전의 추억 ■ 대전의 추억 이상엽한밭이라는 대전살기 좋은 도시다한때 대전에서 2년개업했었고환갑 지나 남도 쪽 놀러 가기좋다고대전에서 2년 살고갑천이 흐르고계룡산이 가깝고서해안까지 1시간 조금 더남도까지 달리면 남쪽 바다까지2시간살기 좋은 곳 ■시와 인술 사이, 사람을 품은 삶— 이상엽 박사를 말하다 김왕식 이상엽 박사는 정형외과 전문의다. 그러나 단순히 뛰어난 의학 지식과 수술 기술로 기억되기엔, 그의 삶은 훨씬 더 깊고 넓다. 정형외과 분야에서 특히 무릎 관절 치료에 탁월한 성과를 이뤄내며 ‘명의’로 .. 2025. 4. 11.
햇살을 닮은 사람, 엘리너 ■           햇살을 닮은 사람, 엘리너달삼은 그날따라 마음이 무거웠다. 평소처럼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속은 어딘가 모르게 허전했다. 괜찮은 척하는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졌고,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더 큰 소리로 웃어야 했다.그럴 때면 어김없이 찾는 곳이 있었다. 산비탈을 따라 난 좁은 길 끝,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있는 기와집. 스승이 머무는 곳이었다.스승은 마당에 떨어진 감 하나를 주워 손바닥 위에 굴리고 있었다. 달삼이 들어서자마자, 눈을 들지 않고 말했다.“오늘은 어떤 생각이 널 이리 이끌었느냐.”달삼은 잠시 말을 고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스승님… 사람들 앞에선 늘 밝은 척하고, 괜찮은 척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얼굴 뒤에 감추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스스로도.. 2025. 4. 11.
4. 스승과 달삼의 대화 ㅡ 나무의자 3화 3화.■                    나무의자나무의자는 오래 앉을수록 더 편해진다. 반듯하지만 억세지 않고, 조용하지만 품이 넓다. 나뭇결 속에 스민 온기와 삐걱이는 소리는, 삶의 굴곡을 받아들인 시간의 흔적이다. 비록 낡고 삐걱거리더라도, 누군가가 앉아 주기만 하면 언제나 제 자리를 내주는 존재. 나무의자는 그렇게 우리에게 ‘기다림’과 ‘받아냄’을 가르쳐준다.□해 질 무렵, 달삼은 마당 한 켠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았다. 페인트가 벗겨진 등받이, 한 쪽 다리가 살짝 짧아 흔들리는 균형. 오래된 의자였다.“스승님, 이 의자는 삐걱거리긴 해도 이상하게 정이 가요.”스승도 조용히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그건 오랜 시간 누군가의 무게를 받아준 의자기 때문이지. 낡았다는 건 쓸모를 다했다는 게 아니라, 많.. 2025. 4. 11.
3. 스승과 달삼의 대화 ㅡ 빈 그릇 2화 2화■               빈 그릇빈 그릇은 비어 있어서 아름답다. 허전함이 아니라, 채워질 수 있다는 여백이다. 밥을 담기 전에도, 다 비워낸 후에도 그릇은 같은 자리에서 묵묵하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를 채우는 일에 익숙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비울 수 있는 용기’다. 비워야 담을 수 있고, 담았던 것보다 남긴 마음이 더 오래간다. 빈 그릇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없이 가르쳐준다.□달삼은 설거지를 하다 손에 남은 그릇을 들어 올렸다. 하얗고 얇은 사기그릇.“스승님, 다 비운 그릇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에요. 허전한 듯, 깔끔한 듯, 이상하게 편안해요.”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그 옆에 앉았다.“그건 네 마음이 지금 어딘가 비워진 상태이기 때문이지. 가득 찼을 때보다, 다 비웠을 때가 오히.. 2025.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