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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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그릇
빈 그릇은 비어 있어서 아름답다. 허전함이 아니라, 채워질 수 있다는 여백이다. 밥을 담기 전에도, 다 비워낸 후에도 그릇은 같은 자리에서 묵묵하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를 채우는 일에 익숙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비울 수 있는 용기’다. 비워야 담을 수 있고, 담았던 것보다 남긴 마음이 더 오래간다. 빈 그릇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없이 가르쳐준다.
□
달삼은 설거지를 하다 손에 남은 그릇을 들어 올렸다. 하얗고 얇은 사기그릇.
“스승님, 다 비운 그릇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에요. 허전한 듯, 깔끔한 듯, 이상하게 편안해요.”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그 옆에 앉았다.
“그건 네 마음이 지금 어딘가 비워진 상태이기 때문이지. 가득 찼을 때보다, 다 비웠을 때가 오히려 충만할 수 있어.”
“예전엔 그릇이 가득해야 기분이 좋았는데… 요즘은 비운 그릇을 보면 더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도 그래. 꽉 찬 사람보다, 비울 줄 아는 사람이 편하지. 빈 그릇은 새로운 것을 담을 준비가 된 상태야. 여백은 기다림의 또 다른 이름이지.”
달삼은 그릇을 천으로 닦으며 말했다.
“그런데요, 스승님. 가득 채웠는데도 허전할 때가 있어요. 반대로 비었는데도 마음이 꽉 찰 때가 있고요.”
“그건 그 안에 무엇을 담았느냐의 차이야. 음식뿐 아니라 마음도 그래. 무게보다 내용이 중요하다는 걸 그릇은 조용히 보여주는 거지.”
그들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빈 그릇 하나를 가운데 놓고, 그저 바라보았다.
달삼이 말했다.
“스승님, 이 그릇은 수십 번을 채우고 비워졌을 텐데도 여전히 단단하네요.”
“그건 그릇이 무엇을 견뎌왔는지를 보여주는 거야. 삶도 마찬가지지. 얼마나 채웠느냐보다 얼마나 잘 비워냈는지가 사람을 깊게 만들지.”
잠시 정적이 흐르자, 바람이 창문을 타고 들어왔다. 그 바람에 식탁 위 냅킨이 가볍게 흔들렸다.
“스승님, 혹시 마음도 그릇이라면… 어떤 마음이 좋은 그릇일까요?”
스승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남의 것을 담을 수 있는 마음, 한 번 담고 나서도 남김없이 씻어낼 줄 아는 마음. 그게 좋은 그릇이야. 쉽게 깨지지 않고, 쉽게 넘치지 않고.”
달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마음이 되고 싶어요. 부담스럽지 않고, 따뜻하고, 한 번 쓰고 나면 다시 보고 싶어지는 마음.”
스승은 그 말을 천천히 되뇌며 말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스스로의 허기를 알아야 해. 자기 안에 얼마나 비워야 하는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씻어내야 하는지. 그건 시간이 알려줘.”
그날 저녁, 달삼은 그 빈 그릇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릇 하나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느껴졌다. 비어 있는 것이 꼭 부족한 게 아니라는 걸, 때로는 가장 충만한 상태가 ‘비어 있음’이라는 걸,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빈 그릇은 다가가야만 비로소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비움이 곧 여백이고, 여백은 곧 가능성이다.
채우기만 급급한 삶은 결국 넘치고 흘러 상처를 남긴다. 하지만 조용히 비워가는 마음은, 오래도록 사람을 품는다.
달삼은 결심했다. 누군가의 허기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 같은 마음이 되고 싶다고.
그리고 언제든, 다정히 비워둘 준비가 되어 있는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
아무 말 없이 가만히, 그러나 누구보다 깊게 사람을 채워주는 그릇처럼.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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