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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닮은 사람, 엘리너
달삼은 그날따라 마음이 무거웠다. 평소처럼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속은 어딘가 모르게 허전했다. 괜찮은 척하는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졌고,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더 큰 소리로 웃어야 했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찾는 곳이 있었다. 산비탈을 따라 난 좁은 길 끝,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있는 기와집. 스승이 머무는 곳이었다.
스승은 마당에 떨어진 감 하나를 주워 손바닥 위에 굴리고 있었다. 달삼이 들어서자마자, 눈을 들지 않고 말했다.
“오늘은 어떤 생각이 널 이리 이끌었느냐.”
달삼은 잠시 말을 고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스승님… 사람들 앞에선 늘 밝은 척하고, 괜찮은 척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얼굴 뒤에 감추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스스로도 자꾸 잊게 됩니다.”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너 자신도 모르게 버거운 걸 억지로 들고 있는 모양이구나.”
달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혹시… 고통을 껴안고도 끝까지 환하게 살아간 사람이 있었나요? 괴로움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그걸 품고 빛이 된 사람…”
그때 스승은 마침내 손에 들고 있던 감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렇지. 있었다. 모두가 좋아한 한 여인. 그러나 아무도 몰랐던 그녀의 깊은 이야기. 오늘은 그 이야기를 너에게 해주려 한다.”
달삼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바람이 느티나무 잎을 흔드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렇게, 한 여인의 빛나는 생을 품은 이야기가, 천천히 시작되었다.
“스승님, 웃는 얼굴이 꼭 행복한 사람의 표정인가요?”
달삼의 질문에 스승은 한참을 말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반은 맞고 반은 아니지. 진짜 행복해서 웃는 이도 있지만, 고통을 이기기 위해 웃는 이도 있어. 그 미소가 어쩌면 가장 아름다워.”
스승은 한 권의 노트를 꺼내 들었다. 연한 갈색 표지에 ‘엘리너’라고 적혀 있었다.
“이 여인도 그런 사람이었지. 모두가 좋아했던 여인, 하지만 아무도 몰랐던 진실을 안고 산 사람.”
엘리너 루스벨트. 그녀의 표정은 늘 ‘매우 밝음’이었다. 그 밝은 얼굴로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나눠주었지만,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녀가 열 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는 것을. 하루 한 끼를 해결하기 위해 혹독한 노동을 해야 했다는 것을.
“스승님, 그런 사람은 어떻게 그토록 환하게 웃을 수 있었을까요? 저라면 원망만 했을지도 몰라요.”
“달삼아, 그녀에겐 남들이 갖지 못한 자산이 있었거든. 낙관적 인생관. 어떤 절망도 그녀를 침묵시키지 못했지. 비관적인 언어를 아예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해.”
그녀는 돈을 ‘땀과 눈물의 종잇조각’이라 불렀다. 그러나 삶을 저주하진 않았다. 오히려 삶을 껴안았다. 그런 그녀가 어머니가 되었고, 여섯 아이 중 한 아이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아직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다섯이나 있는걸요.]
“스승님... 저 말 한마디에 저도 위로를 받는 기분이에요.”
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고통 속에서도 남은 빛을 보는 사람. 그게 진짜 낙관이지.”
그녀의 남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정치인으로 명성이 높았으나, 39세의 나이에 소아마비로 하반신이 마비되었다. 방 안에서 나올 생각도 하지 않던 남편. 어느 맑은 날, 그녀는 말없이 휠체어를 밀며 정원으로 나갔다.
[비가 온 뒤에는 꼭 맑은 날이 와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병으로 다리는 불편해졌지만, 당신 자신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어요.]
“달삼아, 사랑이란 건 상대를 낫게 하진 못해도 다시 일어서게 할 수는 있단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불구자요. 당신, 그래도 나를 사랑하겠소?]
[아니 여보! 내가 지금까지 당신의 두 다리만을 사랑했나요?]
달삼은 그 대답에 소리 내어 웃었다.
“스승님, 그건 위트 이상의 사랑이에요.”
“그래. 지혜는 고통 속에서 탄생하고, 사랑은 그 지혜를 행동하게 하지.”
엘리너는 남편의 의지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4선 대통령이 되었다. 대공황의 그늘 아래서 미국을 구해낸 지도자, 그 그림자 뒤에는 한 여인의 웃음이 있었다.
“스승님, 엘리너가 쓴 글 중에 ‘삶은 선물입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와닿아요.”
스승은 노트를 달삼에게 건넸다.
[삶은 선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의 삶을 스쳐 지나가지만,
진정한 친구들만이 당신의 마음에 선물을 남깁니다.
스스로를 조절하려면 머리를,
타인을 조절하려면 마음을 써야 합니다.
노여움(anger)은 위험(danger)에서 ‘d’ 한 글자가 빠진 것일 뿐입니다.]
“달삼아, 네가 진정한 사람으로 자라려면 기억하렴.
큰 사람은 아이디어를 이야기하고,
보통 사람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작은 사람은 사람을 이야기한다.”
달삼은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이 짧은 문장들이 마치 그의 내면을 흔드는 파문처럼 울려 퍼졌다.
“스승님, 아름다운 노년은 예술작품이라고 했죠? 전, 그런 예술을 닮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스승은 미소 지었다.
“그렇다면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겠지.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미스터리이며, 오늘은 선물이니까.”
햇살이 창밖을 물들였다. 달삼은 엘리너처럼 오늘이라는 선물을 꼭 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선물 하나를 남길 수 있는 사람으로 자라고 싶었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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