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
골목길
골목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길과 길 사이, 삶과 삶이 맞닿는 지점이다. 넓은 도로에선 볼 수 없는 낡은 벽돌, 창틀 너머로 흐르던 연기, 고무신 끄는 소리, 골목은 기억이 쉬어가는 곳이다.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 사이, 아직 사라지지 못한 마음 하나가 남아 있다면, 아마 그건 골목 어귀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
달삼은 오래된 골목길 입구에 서 있었다. 벽돌 담벼락에 이끼가 끼고, 전깃줄은 낮게 늘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된장국 끓는 냄새가 났다.
“스승님, 이 길은 처음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아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길처럼요.”
스승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골목길은 기억의 복도지. 많은 이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 길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어. 그 자국들이 모여 골목의 결이 된단다.”
“큰길은 방향이 분명한데, 골목은 어디로 갈지 몰라요. 그래서 조금 겁이 나기도 해요.”
“삶도 그렇지. 큰길은 질서가 있고, 규칙이 있지만, 진짜 이야기는 늘 비켜난 골목에서 피어나지. 아이들 웃음도, 할머니의 잔소리도, 가게 문간에서 나누던 안부도… 다 그런 골목에서 태어난 거야.”
달삼은 담벼락을 손끝으로 쓸며 말했다.
“벽에 낙서가 많아요. 이름도 있고, 날짜도 있고… 무슨 의미로 남긴 걸까요?”
스승은 그 글자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우지 못한 말, 전하지 못한 감정. 골목은 그런 것들의 마지막 쉼터야. 마음은 때때로 말보다 벽에 더 잘 새겨지거든.”
골목 안쪽으론 빨래가 펄럭이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바람을 따라 뛰어다녔다.
“스승님, 이 길은 누가 정해둔 것도 아닌데… 누군가는 매일 걷는 삶의 일부였겠죠.”
“맞아. 골목은 목적지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중요해. 가는 곳보다, 그 길에서 만나는 풍경과 표정들이 삶의 진짜 이야기가 되는 거지.”
“그러면… 제 인생도 어쩌면 지금 골목길을 걷고 있는 중일까요?”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삼아, 인생은 정해진 고속도로가 아니란다. 우리는 늘 골목을 지난다. 휘어져 있고, 돌아가며, 때로는 막혀 있는 길. 그 안에서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마주하게 되지.”
잠시 후, 골목 끝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달삼은 말없이 그 소리를 따라 걸었다.
“스승님, 이 골목이 끝나면 어디로 나가게 될까요?”
스승은 미소 지었다.
“그건 이 골목을 어떻게 걸었느냐에 따라 다르지. 중요한 건 끝이 아니라, 걸어가는 마음이야.”
달삼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벽에 기대앉은 고양이, 창문 틈에 놓인 화분, 자전거 바퀴 자국… 낯설지 않은 것들이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듯했다.
□
골목길은 작고 구불구불하지만, 그 안엔 사람과 시간이 부딪히며 남긴 온기가 스며 있다. 목적지가 없는 길이지만, 그 길을 걷는 동안 내 안에 있는 수많은 표정을 마주하게 된다.
달삼은 골목의 끝을 묻지 않았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끝이 아니라, 걸어온 길 위에 남은 발자국이 나를 말해준다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도 그 골목 어귀 어딘가에서 여전히, 여운처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을.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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