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합니다.
  • '수필부문' 수상 등단, '평론부문' 수상 등단, '시부문' 수상 등단, 한국문학신문 공모 평론부문 대상 수상
청람과 수필

2. 스승과 달삼의 대화 ㅡ 골목길 1화

by 청람등불 2025. 4. 11.



 

 

 

 


1화




                                골목길


골목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길과 길 사이, 삶과 삶이 맞닿는 지점이다. 넓은 도로에선 볼 수 없는 낡은 벽돌, 창틀 너머로 흐르던 연기, 고무신 끄는 소리, 골목은 기억이 쉬어가는 곳이다.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 사이, 아직 사라지지 못한 마음 하나가 남아 있다면, 아마 그건 골목 어귀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달삼은 오래된 골목길 입구에 서 있었다. 벽돌 담벼락에 이끼가 끼고, 전깃줄은 낮게 늘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된장국 끓는 냄새가 났다.

“스승님, 이 길은 처음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아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길처럼요.”

스승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골목길은 기억의 복도지. 많은 이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그 길을 완전히 지우지 못했어. 그 자국들이 모여 골목의 결이 된단다.”

“큰길은 방향이 분명한데, 골목은 어디로 갈지 몰라요. 그래서 조금 겁이 나기도 해요.”

“삶도 그렇지. 큰길은 질서가 있고, 규칙이 있지만, 진짜 이야기는 늘 비켜난 골목에서 피어나지. 아이들 웃음도, 할머니의 잔소리도, 가게 문간에서 나누던 안부도… 다 그런 골목에서 태어난 거야.”

달삼은 담벼락을 손끝으로 쓸며 말했다.
“벽에 낙서가 많아요. 이름도 있고, 날짜도 있고… 무슨 의미로 남긴 걸까요?”

스승은 그 글자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우지 못한 말, 전하지 못한 감정. 골목은 그런 것들의 마지막 쉼터야. 마음은 때때로 말보다 벽에 더 잘 새겨지거든.”

골목 안쪽으론 빨래가 펄럭이고,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바람을 따라 뛰어다녔다.
“스승님, 이 길은 누가 정해둔 것도 아닌데… 누군가는 매일 걷는 삶의 일부였겠죠.”

“맞아. 골목은 목적지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중요해. 가는 곳보다, 그 길에서 만나는 풍경과 표정들이 삶의 진짜 이야기가 되는 거지.”

“그러면… 제 인생도 어쩌면 지금 골목길을 걷고 있는 중일까요?”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달삼아, 인생은 정해진 고속도로가 아니란다. 우리는 늘 골목을 지난다. 휘어져 있고, 돌아가며, 때로는 막혀 있는 길. 그 안에서야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마주하게 되지.”

잠시 후, 골목 끝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렸다. 달삼은 말없이 그 소리를 따라 걸었다.

“스승님, 이 골목이 끝나면 어디로 나가게 될까요?”

스승은 미소 지었다.
“그건 이 골목을 어떻게 걸었느냐에 따라 다르지. 중요한 건 끝이 아니라, 걸어가는 마음이야.”

달삼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벽에 기대앉은 고양이, 창문 틈에 놓인 화분, 자전거 바퀴 자국… 낯설지 않은 것들이 자신을 향해 인사하는 듯했다.



골목길은 작고 구불구불하지만, 그 안엔 사람과 시간이 부딪히며 남긴 온기가 스며 있다. 목적지가 없는 길이지만, 그 길을 걷는 동안 내 안에 있는 수많은 표정을 마주하게 된다.
달삼은 골목의 끝을 묻지 않았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끝이 아니라, 걸어온 길 위에 남은 발자국이 나를 말해준다는 것을.
그리고 누군가의 마음도 그 골목 어귀 어딘가에서 여전히, 여운처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것을.


ㅡ 청람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