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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과 시문학64

흑백사진 ■ 흑백사진 색을 잃은 대신선명함이 남았다그때의 표정, 눈빛, 거리모든 게더 또렷이 보인다추억은지운 색 위에 선다 ㅡ 청람 2025. 4. 14.
버려진 화분 하나에서 피어난 것 ■ 버려진 화분 하나에서 피어난 것 김왕식아파트 단지의 구석,재활용품 더미 옆에 쓸쓸히 놓인 화분 하나.금이 가고, 흙은 갈라져 먼지를 품고,모든 가능성이 스러진 듯한 자리.그러나 그 속에서손톱만 한 푸른 잎 하나가말없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햇살 한 줄 스미지 않는 그늘,물기조차 사라진 메마른 흙 틈.무관심의 시간 속에서도그 작은 잎은 스스로를 놓지 않았다.수많은 발길은 지나쳤고,누군가는 그것을 '끝'이라 불렀지만,어떤 눈길은 그 자리에 잠시 멈췄다.그리고 마침내,금이 간 화분은 햇살 드는 창가로 옮겨졌고묵은 흙을 덜어낸 자리에조심스레 물이 스며들었다.푸른 잎은 날마다 아주 조금씩 자랐다.어제와 다를 바 없어 보이던 그 모습도오늘은 더 .. 2025. 4. 14.
낡은 구두의 말 ■ 낡은 구두의 말 김왕식신발장 구석, 빛바랜 갈색 구두 한 켤레.굽은 닳고 앞코는 긁히고 가죽은 주름졌다.버리자니 손에 밴 온기가 아쉽고,신자니 남의 눈이 걸리는 그 세월의 짝이었다.어느 날 문득, 손이 갔다.솔로 먼지를 털고, 헝겊으로 문지르며묵은 침묵을 닦아냈다.굽엔 조심스레 본드를 발랐다.발에 넣자마자, 낯익은 편안함이 되살아났다.오래된 그 구두는 여전히 발을 기억하고 있었다.거리로 나서자, 기억들이 발끝에서 깨어났다.첫 출근길의 긴장, 데이트하던 오후의 설렘,차분히 아버지 제사에 가던 날의 정적,그리고, 말없이 퇴직하던 그날의 허전함.그 모든 굽이마다구두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한숨도, 미소도, 망설임도,시.. 2025. 4. 14.
기우제 ㅡ 시인 변희자 ■ 기우제 시인 변희자정말 무서워요하늘님이 땅이 타들어 가요나무ㆍ집ㆍ절ㆍ사람들까지 사라지고 있어요그곳엔슬픈 일이 없나요제발 울어 주세요눈물로 대지를 적셔불길을 씻어 주세요■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ㅡ변희자 시인의 '기우제'는 단순한 ‘비를 기원하는 기도’의 차원을 넘어서, 극심한 재난 속에서 인간이 하늘에 바치는 절박한 호소문이다. 경상남북도를 휩쓴 거대한 산불, 그것이 삼켜버린 자연과 집, 공동체와 생명 앞에서, 시인은 한 줄의 외침으로 시작한다. “정말 무서워요”라는 고백은 어린아이처럼 순전하면서도, 절망 앞에 선 인간의 본능적 떨림을 드러낸다.“하늘님”이라 부르는 존재는 종교적 신일 수도, 자연의 질서일 수.. 2025. 4. 12.
불의 계절, 기도의 손 ■ 불의 계절, 기도의 손 김왕식 . 한 아이가 무릎 꿇는다.세상은 무너지고 있었다.정치의 혀는 서로를 찢으며,경제의 심장은 뿌리째 흔들려하루하루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시대.그리고 산불.산 하나가 타오르고,마을이 타고,사람들의 기억이 타고,마침내 하늘마저 붉게 물든다.모든 것이 타는 그 자리,모두가 등을 돌린 그 순간—그 소녀는, 한없이 작은 몸으로세상의 무게를 짊어진 듯조용히, 아주 조용히,두 손을 모아 무릎을 꿇었다.그 손엔 무엇이 들렸을까.검은 재를 움켜쥔 손바닥일까.부서진 희망을 꿰매려는 실밥일까.아니면, 단지 누군가의 안녕을 비는뜨거운 눈물 한 방울.. 2025. 4. 12.
고요를 낚는 사람 ■                      고요를 낚는 사람                                    김왕식  새벽은, 언제나 조용히 다가온다.숨결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낮게.세상의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 시간—누군가는, 낚시 도구를 챙긴다.조심스럽게.마치 마음을 꺼내듯, 주섬주섬.그것은 단지 물고기를 위한 채비가 아니다.어제의 소음을 벗고,오늘의 고요를 맞이하려는 의식이다.그는, 숲 속 저수지로 향한다.나무들은 잠든 듯 고요하고물은 속삭이는 듯 잔잔하다.그 사이를 천천히, 그는 걸어간다.낚싯대를 든 그의 모습은—자연 속에 스며든 한 줄기 호흡 같다.세상과 한 걸음 떨어진 곳.그곳에서 그는 세월을 낚고자 한다.낚싯대는 기다림의 언어이고무딘 바늘은, 삶의 흔적이다.날카로움은 닳아 .. 2025. 4.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