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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구두의 말
김왕식
신발장 구석, 빛바랜 갈색 구두 한 켤레.
굽은 닳고 앞코는 긁히고 가죽은 주름졌다.
버리자니 손에 밴 온기가 아쉽고,
신자니 남의 눈이 걸리는 그 세월의 짝이었다.
어느 날 문득, 손이 갔다.
솔로 먼지를 털고, 헝겊으로 문지르며
묵은 침묵을 닦아냈다.
굽엔 조심스레 본드를 발랐다.
발에 넣자마자, 낯익은 편안함이 되살아났다.
오래된 그 구두는 여전히 발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리로 나서자, 기억들이 발끝에서 깨어났다.
첫 출근길의 긴장, 데이트하던 오후의 설렘,
차분히 아버지 제사에 가던 날의 정적,
그리고, 말없이 퇴직하던 그날의 허전함.
그 모든 굽이마다
구두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
한숨도, 미소도, 망설임도,
시간의 먼지를 밟으며, 묵묵히 함께 걸었다.
낡은 구두는 한 사람의 일기장이다.
말은 없지만,
모퉁이마다 묻어난 사연과 침묵의 기록을 품고 있다.
그날 오후, 산소를 찾았다.
진창길을 조심히 딛고,
무릎 꿇은 발아래, 낡은 구두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걸어온 길, 참 고마웠다.”
해 질 녘 집으로 돌아와 구두를 벗었다.
구석에 놓였던 친구는 다시 주인의 곁에 섰다.
그 밤, 어쩐지 마음 깊은 곳이 따뜻해졌다.
오래된 것들이 가르쳐주는 건
'빠름보다 깊이'였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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