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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제
시인 변희자
정말 무서워요
하늘님
이 땅이 타들어 가요
나무ㆍ집ㆍ절ㆍ사람들까지 사라지고 있어요
그곳엔
슬픈 일이 없나요
제발 울어 주세요
눈물로 대지를 적셔
불길을 씻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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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변희자 시인의 '기우제'는 단순한 ‘비를 기원하는 기도’의 차원을 넘어서, 극심한 재난 속에서 인간이 하늘에 바치는 절박한 호소문이다. 경상남북도를 휩쓴 거대한 산불, 그것이 삼켜버린 자연과 집, 공동체와 생명 앞에서, 시인은 한 줄의 외침으로 시작한다. “정말 무서워요”라는 고백은 어린아이처럼 순전하면서도, 절망 앞에 선 인간의 본능적 떨림을 드러낸다.
“하늘님”이라 부르는 존재는 종교적 신일 수도, 자연의 질서일 수도 있다. 시인은 그 존재를 향해 무릎 꿇고 애원한다. “이 땅이 타들어 가요”라는 호소는 단순한 자연현상 기술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 생명 전체의 소실을 의미한다.
“나무ㆍ집ㆍ절ㆍ사람들까지 사라지고 있어요”라는 구절은, 재난이 가져온 파괴가 물질적 손실을 넘어 영혼과 믿음, 공동체마저 앗아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그곳엔 슬픈 일이 없나요”라는 질문은, 하늘 혹은 신이 고통을 알기나 하는지 되묻는 인간의 존재론적 회의다. 그럼에도 시인은 분노하지 않는다. 외려 “제발 울어 주세요”라고 간절히 빈다. 신의 눈물을 통해 “대지를 적셔”주기를, “불길을 씻어”주기를 원한다. 이 장면은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고통 속에서도 간절함을 잃지 않는 숭고한 정신을 담고 있다.
작가의 삶의 가치철학은 바로 여기서 드러난다. 고통 앞에서도 분노나 절망보다는 간청과 염원을 택하는 태도, 인간 중심의 구원이 아니라 생명 전체를 위한 회복을 바라는 기도는, 시인의 생명존중 사유와 공동체적 미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전통적 기우제는 집단의례였지만, 이 시는 한 여성의 개인적 기도가 되면서 더욱 뭉클하게 다가온다. 그 가녀린 목소리는 오히려 세상을 향한 가장 강한 외침으로 바뀌며, 시는 독자에게 자연과 인간, 신과 생명에 대해 깊은 사유를 이끈다. 정제된 언어와 순수한 울림 속에 시인은 고통조차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미의식을 보여준다.
요컨대, '기우제'는 재난의 현실 속에서도 생명을 향한 간절한 염원을 담은 시로, 인간과 자연, 신의 관계를 순전한 언어로 풀어낸 깊이 있는 작품이다. 시인의 겸허한 삶의 자세와 생명철학, 그리고 절제된 아름다움이 고통의 무게를 감싸 안으며, 독자의 마음을 묵직하게 울린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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