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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에세이42

햇살을 닮은 사람, 엘리너 ■           햇살을 닮은 사람, 엘리너달삼은 그날따라 마음이 무거웠다. 평소처럼 웃으며 하루를 시작했지만, 속은 어딘가 모르게 허전했다. 괜찮은 척하는 자신이 어색하게 느껴졌고,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더 큰 소리로 웃어야 했다.그럴 때면 어김없이 찾는 곳이 있었다. 산비탈을 따라 난 좁은 길 끝,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 있는 기와집. 스승이 머무는 곳이었다.스승은 마당에 떨어진 감 하나를 주워 손바닥 위에 굴리고 있었다. 달삼이 들어서자마자, 눈을 들지 않고 말했다.“오늘은 어떤 생각이 널 이리 이끌었느냐.”달삼은 잠시 말을 고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스승님… 사람들 앞에선 늘 밝은 척하고, 괜찮은 척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그런 얼굴 뒤에 감추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걸… 스스로도.. 2025. 4. 11.
4. 스승과 달삼의 대화 ㅡ 나무의자 3화 3화.■                    나무의자나무의자는 오래 앉을수록 더 편해진다. 반듯하지만 억세지 않고, 조용하지만 품이 넓다. 나뭇결 속에 스민 온기와 삐걱이는 소리는, 삶의 굴곡을 받아들인 시간의 흔적이다. 비록 낡고 삐걱거리더라도, 누군가가 앉아 주기만 하면 언제나 제 자리를 내주는 존재. 나무의자는 그렇게 우리에게 ‘기다림’과 ‘받아냄’을 가르쳐준다.□해 질 무렵, 달삼은 마당 한 켠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았다. 페인트가 벗겨진 등받이, 한 쪽 다리가 살짝 짧아 흔들리는 균형. 오래된 의자였다.“스승님, 이 의자는 삐걱거리긴 해도 이상하게 정이 가요.”스승도 조용히 옆에 걸터앉으며 말했다.“그건 오랜 시간 누군가의 무게를 받아준 의자기 때문이지. 낡았다는 건 쓸모를 다했다는 게 아니라, 많.. 2025. 4. 11.
3. 스승과 달삼의 대화 ㅡ 빈 그릇 2화 2화■               빈 그릇빈 그릇은 비어 있어서 아름답다. 허전함이 아니라, 채워질 수 있다는 여백이다. 밥을 담기 전에도, 다 비워낸 후에도 그릇은 같은 자리에서 묵묵하다. 우리는 살면서 무언가를 채우는 일에 익숙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비울 수 있는 용기’다. 비워야 담을 수 있고, 담았던 것보다 남긴 마음이 더 오래간다. 빈 그릇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없이 가르쳐준다.□달삼은 설거지를 하다 손에 남은 그릇을 들어 올렸다. 하얗고 얇은 사기그릇.“스승님, 다 비운 그릇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에요. 허전한 듯, 깔끔한 듯, 이상하게 편안해요.”스승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그 옆에 앉았다.“그건 네 마음이 지금 어딘가 비워진 상태이기 때문이지. 가득 찼을 때보다, 다 비웠을 때가 오히.. 2025. 4. 11.
2. 스승과 달삼의 대화 ㅡ 골목길 1화 1화■ 골목길골목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길과 길 사이, 삶과 삶이 맞닿는 지점이다. 넓은 도로에선 볼 수 없는 낡은 벽돌, 창틀 너머로 흐르던 연기, 고무신 끄는 소리, 골목은 기억이 쉬어가는 곳이다. 빠르게 사라지는 것들 사이, 아직 사라지지 못한 마음 하나가 남아 있다면, 아마 그건 골목 어귀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달삼은 오래된 골목길 입구에 서 있었다. 벽돌 담벼락에 이끼가 끼고, 전깃줄은 낮게 늘어져 있었다. 어디선가 된장국 끓는 냄새가 났다.“스승님, 이 길은 처음인데도 이상하게 낯설지 않아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길처럼요.”스승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골목길은 기억의 복도지. 많은 이들이 지나갔지만, 아무도.. 2025. 4. 11.
1. 스승과 달삼의 대화 ㅡ 서문 Prologue ■ Prologue 오래된 말의 안쪽으로, 스승과 달삼이 걸어간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개의 단어를 지나친다. 아무렇지 않게 스쳐 가지만, 그 말들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곁에 머물며 조용히 인생을 말해왔다. 찻잔, 마루, 바람, 빈 그릇, 손 편지, 골목길… 그런 말들엔 때로는 잊힌 정서가, 때로는 잃어버린 얼굴이 숨어 있다. 그러나 익숙함은 가장 먼저 시들기 마련이라, 우리는 그 단어들에 깃든 삶의 온기를 종종 놓치곤 한다. 이 글은 그런 단어들을 다시 불러내는 여정이다. ‘스승’이라 불리는 존재와, 삶을 배워가는 제자 ‘달삼’이 함께 걷는다. 둘은 늘 같이 앉아 있고, 묻고, 기다리고, 때로는 침묵 속에서 답을 찾는다. 어떤 날은 비 오는 날 부쳐 먹는 빈대떡 한 장이 되고, 어떤 .. 2025. 4. 11.
사상계는 ㅡ 깨어 있는 정신의 놀이터 ■  생각하는 인간의 품격, 사상의 세계                                      청람 김왕식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는다.생각 없이 빵만 먹다 보면, 결국 빵조차 빼앗긴다. 장준하 선생이 『사상계』를 만들며 외친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이제, 생각하자.”시대는 침묵을 강요했고, 권력은 복종을 원했지만, 그는 고요한 죽음을 거부하고 뜨거운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의 뿌리는 바로 ‘사상의 세계’에 있었다.사상의 세계란 뭘까?한마디로 말하자면, ‘깨어 있는 정신의 놀이터’다. 그냥 생각만 굴리는 머리 운동장이 아니라, 생각한 것을 말하고, 말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의 마당이었다. 거기엔 철학이 있었고, 문학이 있었으며, 뜨거운 정의감과 차가운 현실인식이 공존했다. 『사상계.. 2025. 4.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