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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에세이35

헌책방 4화.■ 헌 책방헌 책방은 시간이 머무는 곳이다. 새 책의 반짝임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누군가의 손때와 밑줄, 책갈피가 남아 있다. 정리된 지식보다는 어지러운 기억이, 깔끔한 글귀보다는 눌린 감정이 더 깊이 스며든다. 이곳에선 책이 말을 건다. 오래 기다렸다고, 지금 읽어달라고. 헌 책방은 그렇게,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을 다시 꺼내어준다.□달삼은 좁은 골목 끝, 조용히 열린 책방 문을 밀었다. 종이 냄새와 함께 묵은 시간들이 얼굴을 스쳤다.서가마다 가지런하진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오랜 묵언을 지켜온 책들이 있었다.“스승님, 새 책방은 반짝이는데, 여긴 묘하게 눅진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더 가라앉아요.”스승은 문득 손에 들린 책 한 권을 가볍게 쓸며 .. 2025. 4. 14.
말보다 오래 남는 건 그날의 표정이다 ■말보다 오래 남는 건 그날의 표정이다 김왕식우리는 수많은 말을 주고받는다.그중 어떤 말은 며칠 만에 잊히고,어떤 말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하지만 사람의 마음에오래 남는 건 말이 아니라,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이다.“사람은 말보다 먼저표정을 기억한다.”그날,아무렇지 않게 “괜찮아”라고 말했지만그 표정은 서늘했고,“좋아”라고 말했지만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그래서 말보다 더 선명하게 남은 건그 사람의 눈빛, 침묵, 그리고 떨림이다.표정은 거짓말을 못 한다.말은 감출 수 있지만표정은 감정의 거울이다.마음이 머무는 곳은목소리가 아니라 얼굴이다.“말은 잊히지만,그날의 표정은 마음에 박힌다.”사람과의 관계에서도진심은 표정에서 드러난다.기뻐할 때 함께 웃어준 얼굴,.. 2025. 4. 14.
버려진 화분 하나에서 피어난 것 ■ 버려진 화분 하나에서 피어난 것 김왕식아파트 단지의 구석,재활용품 더미 옆에 쓸쓸히 놓인 화분 하나.금이 가고, 흙은 갈라져 먼지를 품고,모든 가능성이 스러진 듯한 자리.그러나 그 속에서손톱만 한 푸른 잎 하나가말없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햇살 한 줄 스미지 않는 그늘,물기조차 사라진 메마른 흙 틈.무관심의 시간 속에서도그 작은 잎은 스스로를 놓지 않았다.수많은 발길은 지나쳤고,누군가는 그것을 '끝'이라 불렀지만,어떤 눈길은 그 자리에 잠시 멈췄다.그리고 마침내,금이 간 화분은 햇살 드는 창가로 옮겨졌고묵은 흙을 덜어낸 자리에조심스레 물이 스며들었다.푸른 잎은 날마다 아주 조금씩 자랐다.어제와 다를 바 없어 보이던 그 모습도오늘은 더 .. 2025. 4. 14.
신발 한 켤레의 인사 ■ 신발 한 켤레의 인사 현관 앞, 오래된 운동화 한 켤레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낡고 조금 찢어진 발등, 그러나 단정히 묶인 끈. 말 대신 하루를 증명하던 자세였다.그 신발은 아버지의 것이었다. 언제부턴가 집 안에서만 신던 그것을 아버지는 늘 문 앞에 나란히 놓으셨다. 마당 한 바퀴를 돌더라도 꼭 그 신발을 신으셨다. 멀리 나가지 않아도, 하루는 늘 시작이었고, 시작에는 인사가 담겼다.신발을 바라보다 떠오른 생각—하루는 얼마나 멀리 가는가 보다 어디를 향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 아버지의 걸음은 짧았지만, 언제나 돌아올 길을 향해 있었다. 신발의 방향은 말 없는 다정함이었다.그러던 어느 날, 그 신발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병원에 계셨.. 2025. 4. 14.
낡은 구두의 말 ■ 낡은 구두의 말 김왕식신발장 구석, 빛바랜 갈색 구두 한 켤레.굽은 닳고 앞코는 긁히고 가죽은 주름졌다.버리자니 손에 밴 온기가 아쉽고,신자니 남의 눈이 걸리는 그 세월의 짝이었다.어느 날 문득, 손이 갔다.솔로 먼지를 털고, 헝겊으로 문지르며묵은 침묵을 닦아냈다.굽엔 조심스레 본드를 발랐다.발에 넣자마자, 낯익은 편안함이 되살아났다.오래된 그 구두는 여전히 발을 기억하고 있었다.거리로 나서자, 기억들이 발끝에서 깨어났다.첫 출근길의 긴장, 데이트하던 오후의 설렘,차분히 아버지 제사에 가던 날의 정적,그리고, 말없이 퇴직하던 그날의 허전함.그 모든 굽이마다구두는 말없이 걷고 있었다.한숨도, 미소도, 망설임도,시.. 2025. 4. 14.
스승의 가르침, 삶의 길이 되다 ■ 스승의 가르침, 삶의 길이 되다 어느 고즈넉한 봄날, 산책로를 따라 펼쳐진 꽃길 위에서 스승과 제자 달삼은 서로의 눈빛을 마주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람에 실려 오는 꽃내음과 새들의 노랫소리는 두 사람의 마음을 한층 더 깊은 사색 속으로 이끌었다. 이 길 위에서 그들은 단순한 대화를 넘어, 인생의 진리와 아름다움에 대해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스승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멋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요?” 달삼은 조심스레 물으며, 자신의 내면에 품은 수많은 의문들을 한꺼번에 터트리려는 듯했다.스승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의 자연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달삼아, 진정으로 훌륭한 인격을 지닌 사람은 욕망을 스스로 자제할 줄 아는 사람이란다. 욕망에 끌.. 2025. 4.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