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헌 책방
헌 책방은 시간이 머무는 곳이다. 새 책의 반짝임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누군가의 손때와 밑줄, 책갈피가 남아 있다. 정리된 지식보다는 어지러운 기억이, 깔끔한 글귀보다는 눌린 감정이 더 깊이 스며든다. 이곳에선 책이 말을 건다. 오래 기다렸다고, 지금 읽어달라고. 헌 책방은 그렇게, 한 권의 책으로 한 사람을 다시 꺼내어준다.
□
달삼은 좁은 골목 끝, 조용히 열린 책방 문을 밀었다. 종이 냄새와 함께 묵은 시간들이 얼굴을 스쳤다.
서가마다 가지런하진 않아도, 각자의 자리에서 오랜 묵언을 지켜온 책들이 있었다.
“스승님, 새 책방은 반짝이는데, 여긴 묘하게 눅진해요.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은 더 가라앉아요.”
스승은 문득 손에 들린 책 한 권을 가볍게 쓸며 말했다.
“그건 여기엔 ‘누군가가 살았던 흔적’이 있기 때문이지. 헌 책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이전 독자의 시간을 간직한 증거야.”
달삼은 먼지 낀 책을 펼쳤다. 구겨진 페이지 한 귀퉁이에 연필로 작게 써둔 글이 있었다.
‘이 문장을 읽고, 한참을 울었다.’
“스승님, 이건… 누군가 이 문장을 마음으로 읽었다는 거죠?”
“그래, 책은 원래 활자지만,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로 변하지. 밑줄 하나, 접힌 귀 하나에도 감정이 스며 있어. 헌 책방은 그걸 조용히 안고 있는 공간이야.”
달삼은 책장을 넘기다 말고 속표지를 바라보았다. 연한 잉크로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이 사람은 이 책을 언제, 어떤 마음으로 샀을까요?”
“우리는 그걸 다 알 수 없지만, 상상할 수는 있지. 그것이 헌 책방의 미덕이야. 책보다 사람을 읽게 되는 곳.”
“스승님, 새 책은 순결해서 좋지만, 때론 부담스러워요. 헌 책은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친구 같고요.”
“맞아. 새 책은 ‘가르치려는 책’이고, 헌 책은 ‘들어주는 책’이란 말이 있어. 사람도 마찬가지지. 지나온 시간이 묻은 사람일수록 말이 줄고, 이해가 깊지.”
한쪽에 앉아 책을 펼친 스승은 오랜 침묵을 지켰다.
달삼도 아무 말 없이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스승님, 책을 고르는 게 아니라, 책이 저를 고른 느낌이에요.”
“지금 네가 어떤 마음인지, 이 책이 가장 잘 아는 거야. 헌 책방에선 그런 우연이 자주 생겨. 오래 기다린 책이 누군가에게 다시 선택되는 기쁨을 아는 곳이니까.”
바깥의 소음은 점점 멀어졌다. 책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지만, 두 사람의 손끝에선 오래된 문장들이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책도 인연이란 걸 믿게 돼요. 오늘 이 책을 안 골랐다면, 아마 평생 몰랐을 문장인데…”
“살면서 그런 문장 하나를 만나는 일, 그건 사람을 바꾸는 일이기도 하지. 말 대신 문장을 품고 사는 이에게는, 그게 등불이 되거든.”
달삼은 책 한 권을 품에 안았다. 책등이 닳고 구겨진 책이었지만, 왠지 자꾸 손이 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 이 책도, 자신이 손때를 묻히고 밑줄을 긋고, 언젠가 또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하고.
□
헌 책방은 기억을 파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되살리는 공간이다.
책이 사람을 고르고, 사람도 책 안에서 다시 쓰인다.
달삼은 배웠다. 한 문장이 한 사람을 바꾸기도 하고, 그 문장이 새로 피어나는 자리는 결코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는 걸.
오늘 자신이 만난 이 책이, 언젠가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또다시 문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책갈피 사이에 짧은 메모 한 줄을 끼워 넣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는 나를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
ㅡ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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