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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쓰는 시
시인 박진우
사랑이란
고요 속에서만 흐르는 강
침묵 속에서만 들리는
바람의 언어
나를 비운다
순수함으로 한 겹 벗겨내고
고요함으로 한 겹 접어둔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이를 마음에 새기면
그는 오월의 꽃잎이 되어
햇살의 숨결을 고요히 풀어내고
가족을 마음에 깃들이면
그들은 바람의 현이 되어
자연스러운 선율로 흐르고
친구를 마음에 들이면
그는 추억의 새가 되어
휘파람처럼 맑게 퍼진다
만약
마음속에 침묵을 이루는
순수함과 고요함이 없을 때
나는 무슨 힘으로
그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ㅡ
박진우 시인의 시에는 외침이 없다. 그 대신, 속삭임도 아닌, ‘침묵’이 있다. 이 침묵은 비움의 결과로 다가온다. ‘나를 비운다’는 고백은 단지 존재를 지우는 행위가 아니다. 이는 사랑의 전제조건이며, ‘순수함으로 한 겹 벗겨내고 고요함으로 한 겹 접어두는’ 정제의 과정이다. 그는 삶의 찌꺼기를 제거하며 사랑이 깃들 수 있는 자리를 정갈하게 비워낸다.
이 시는 언어 이전의 세계를 향한다. “고요 속에서만 흐르는 강”, “침묵 속에서만 들리는 바람의 언어”라는 구절은 언어가 본래 갖지 못한, 그러나 침묵이 감당하는 진실의 무게를 암시한다. 말로는 닿지 못할 사랑이기에, 그는 침묵을 선택한다. 이 시에서 사랑은 흐르되 말하지 않으며, 머무르되 소유하지 않는다.
사랑의 주체는 시인의 마음 안에서 각각의 존재로 형상화된다. ‘사랑하는 이’는 꽃잎이 되어 햇살의 숨결을 품고, ‘가족’은 바람의 현이 되어 선율을 만들며, ‘친구’는 추억의 새로 날아올라 휘파람처럼 퍼진다. 이 비유들은 시인의 내면이 얼마나 섬세하게 세계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외부의 대상을 내부로 끌어들여 자신의 고요한 심연에서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방식이다.
결국 시인은 질문을 던진다. “마음속에 침묵을 이루는 순수함과 고요함이 없을 때, 나는 무슨 힘으로 그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는 단순한 반성문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다. 인간은 말보다 마음으로 사랑해야 하며, 존재는 침묵 속에서 비로소 순수해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박진우 시인은 삶을 조용히 살아낸다. 작은 사물에도 마음을 기울이고,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품는다. 그는 일상을 서두르지 않고, 감정을 격렬히 밀어붙이지 않는다. 그런 그의 시는 독자에게 단단하고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침묵’이라는 시어가 무력하지 않고, 오히려 힘 있는 사랑의 기초로 작용하는 것은 그의 삶의 철학이 시 속에 자연스럽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 시는 사랑을 다루되 감정의 과잉에 기대지 않는다. 언어의 가장자리를 밀어내고 침묵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섬세한 발걸음이, 시인의 존재 미학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세상의 소란을 잠재우고, 고요함 속에서 진실한 사랑의 무늬를 그려낸 이 시는, 우리가 잊고 지낸 마음의 깊이를 다시금 떠오르게 한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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