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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봄은 달빛으로 운다
김왕식
밤이면 고요한 시골 마을에 달빛이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물비늘처럼 스며든다. 마루 끝에 앉아 별을 세던 누이의 숨결 같은 그 빛은, 지금도 가슴 어딘가에 고요히 출렁인다. 감나무 가지 끝이 바람결에 살짝 흔들릴 때마다, 기억이라는 물웅덩이 속에 조용히 파문이 인다. 장독대 뒤로 어머니의 그림자가 스치고, 졸린 삽살개가 고개를 드는 밤—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서 달빛처럼 살아 있다.
아침이면 햇살이 앞마당을 깨운다. 노란 병아리들이 삐약삐약 울음을 틔우며 아장아장 걷는다. 갓 태어난 바둑이는 뒤뚱거리며 목줄 끝 하트모양 이름표를 찰랑인다. 그 작은 발소리가 흙길 위에 새기는 생의 시구(詩句) 같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먹이를 건네던 그 생명들과, 밥 짓는 연기를 따라 어머니에게 달려가던 내 그림자도 함께 뛰논다. 따뜻한 공기 속, 밥 냄새는 이웃 담장을 넘어 골목길을 덮고, 마을 전체는 하나의 가슴이 되어 고동친다.
마을 뒷산, 박새들의 노래로 아침이 피고, 저녁이면 비둘기의 울음이 중턱을 적신다. 구구구구… 그 소리는 마치 오래된 편지 속 글씨처럼 마음을 적신다. 무덤가 언덕에 할미꽃이 고개를 들고, 흙냄새 속에 젖은 바람은 개구리의 첫 숨을 깨운다. 봄은 소리 없이 찾아오고, 들판은 연초록 꿈을 틔운다. 그 계절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삶을 끌어당겼다.
이제 깊어가는 밤이면, 고향의 봄이 문득 그립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눈을 감으면, 지나간 목소리들이 속삭인다. 할머니의 자장가, 아버지의 콧노래, 어머니의 국 끓는 소리—
그 소리는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씨앗처럼 잠들어 있다. 고향은 땅이 아니고, 풍경이 아니고, 사랑의 흔적이다. 내가 태어나고, 웃고, 울고, 꿈꾸던 시간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향기다.
나무는 늙고 사람은 떠났지만, 고향의 봄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린다. 그리움은 상처가 아니라, 삶을 사람답게 만드는 조용한 불빛이다.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흘러내리던 달빛처럼, 고향은 내 마음속으로 늘 스며든다. 언젠가 다시 그 땅을 밟게 되면,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 깊이 들이마시리라. 그리움이라는 꽃잎이 휘돌아 피어나는, 그 봄날의 향기를.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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