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문학을 사랑하는 분들과 함께 합니다.
  • '수필부문' 수상 등단, '평론부문' 수상 등단, '시부문' 수상 등단, 한국문학신문 공모 평론부문 대상 수상
청람과 수필

청람 서루, 봄날의 서정

by 청람등불 2025. 4. 8.








                    청람 서루, 봄날의 서정






                                    청람 김왕식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뿌려질 때,

그 빛은 무수한 시어로 쏟아진다. 겨우내 굳었던 대지에 첫 숨을 불어넣듯, 봄은 아무 말 없이 존재를 증명한다. 누군가의 사랑처럼, 또는 오래 묵은 용서처럼. 꽃이 핀다. 피어난다는 건 스스로를 열어 세상과 만나겠다는 결심이다. 살며 한 번쯤은, 말없이 핀 꽃 앞에 눈시울을 적셔본 적이 있을 것이다.

들판에 흔들리는 유채꽃 무리, 그 노란 물결은 이별을 떠난 연인의 손수건 같고, 바람결에 스치는 벚꽃은 그리운 이름 하나가 피고 지는 순간을 닮았다.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자연은 기억한다. 봄날의 서정은 말보다 깊고, 시보다 조용하다. 마른 가지에 꽃이 맺히는 건 시간의 기적이다. 우리 마음에도 그런 기적 하나쯤은 숨어 있으리라.

봄은 어느 날 갑자기 오지 않는다.

눈 속에서 움트는 뿌리의 떨림, 얼음 밑에서 흐르던 물의 예감, 그 모든 것이 축적되어 오늘의 따뜻함으로 환생한다. 봄날은 기다림이 만들어낸 선물이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 태동한 계절, 그 속삭임은 나직하되 결코 약하지 않다. 삶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반복이 아니라 되살아남으로.

마을 어귀의 개나리가 웃고, 논두렁 물길을 따라 개구리울음이 번진다. 노인은 굽은 허리로 밭고랑을 타고, 아이는 흙을 움켜쥔 손으로 계절을 체험한다. 봄날은 연령과 상관없이 모든 존재에게 “살아 있음”을 묻는다. 그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하루를 산다. 어제보다 덜 아프고, 오늘보다 더 다정한 내일을 향해.

이 계절의 풍경은 사소하고 찬란하다.

찻잔 옆에 떨어진 꽃잎 하나, 이른 아침 창가에 맺힌 이슬방울, 고양이의 느릿한 기지개. 우리는 그런 장면 앞에서 조용히 인간을 내려놓는다. 말없이 바라보는 것, 그것이 봄날의 예절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은 충동, 오래된 편지를 꺼내어 다시 읽는 마음, 모두 봄이 부추긴다.

봄은 시가 된다.

그것도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누구의 마음에도 닿을 수 있게. 계절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는다. 잘난 이에게도, 초라한 이에게도 똑같은 빛을 내리고, 같은 바람을 불어준다. 그 안에서 인간은 비로소 ‘존재’가 된다. 누군가의 위로가 되지 않아도, 그냥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존엄해지는 순간.

봄날의 서정은 그 모든 것을 품는다.

회복과 시작, 상실과 소망, 자연과 인간. 그것은 단순한 계절이 아닌 생의 언어다. 겨울의 침묵을 견뎌낸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 그 앞에 시인은 시를 내려놓고, 철학자는 사유를 멈춘다. 봄은 설명보다 감응으로, 정의보다 직관으로 다가온다.

지금 이 순간, 청람서루 창밖에 피는 한 송이 꽃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떨림, 그것이 어쩌면 살아 있다는 증거 아닐까. 우리는 꽃처럼 피었다가, 언젠가 조용히 진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사랑하고 바라보고 기다리는 모든 감정이 있다면, 그것이 곧 인간의 서정이요, 봄날의 기적일 것이다.



ㅡ 청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