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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과 수필

고향의 봄은 달빛으로 운다

by 청람등불 2025. 3. 31.







국문과 재학 중
군대 갔다.

3월 접어들자
고향 봄을 그리며
병역수첩에
깨알 같이
끄적인 몇 줄
옮긴다






         고향의 봄은 달빛으로 운다





                     
                         김왕식







오동나무 가지 사이로 달빛이 흐른다
누이의 손을 잡고 별을 줍던 기억처럼
그 은빛은 오래된 숨결로 내 가슴을 어루만진다
밤은 말이 없고, 달은 오래된 편지처럼 반짝인다

감나무 끝이 바람에 떨릴 때마다
어머니의 그림자가 장독대 사이로 스며들고
졸린 삽살개는 꿈결 속을 헤엄친다
기억은, 달빛을 타고 되돌아오는 작은 짐승이다

해가 뜨면 앞마당에 생명이 돋는다
병아리는 노란 낱말이고
갓난 바둑이는 뒤뚱이는 웃음이다
이름표 끝 하트가 아침을 흔들며 달린다

나는 손바닥에 세상을 올려놓고
삐약삐약 소리로 대답했다
그 무렵 공기는 사랑의 온도를 가졌고
밥 냄새는 담장을 넘어 이웃의 마음까지 데웠다

마을 뒤편 야트막한 산은 숨 쉬는 생물이었다
박새들이 지저귀면 하루가 피어나고
비둘기가 울면 저녁은 눈물처럼 젖는다
슬픔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이다

할미꽃이 언덕 위에서 조용히 문을 연다
개구리는 흙냄새 속에서 봄을 깨운다
바람은 바느질처럼 흙을 꿰매고
계절은 그 사이를 타고 무늬처럼 흐른다

밤이면 이불속에서 목소리가 피어난다
할머니의 자장가,
어머니의 부엌칼소리까지
모두 내 영혼의 부레처럼 떠오른다

고향은 나무도, 집도 아니다
그곳은 내가 사람으로 살아낸 온기다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꿰매진 상처들
그 자리에만 피는 꽃이 있다

나무는 늙고 사람은 사라졌어도
그 봄은 여전히 흙 속에서 숨을 고른다
고향은 기다림의 또 다른 말이며
달빛은 매일 밤 그 말을 다시 적는다

언젠가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면
나는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겠다
그리움의 냄새가 피어오를 때
그 봄날의 향기를 가슴 가득 들이마시리니

        


       1982년 3월
   명천 충성대에서
고향을 그리며



ㅡ 김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