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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과 시문학

천년의 잎 ㅡ 시인 소엽 박경숙

by 청람등불 2025. 4. 18.







                    천년의 잎   


                               시인 소엽 박경숙




사위진 연기 자락
산 그늘까지 번지던 날,
차마 너의 안부를 묻지 못했다

붉디붉은 침묵이
지리산 골짝마다 스미는 동안
너만은 살아 있기를
그 바람조차 죄스러워 두 손 모았다

한때,
햇살 한 사발에 목욕하던 뽀얀 잎의 숨결
대숲 바람과 눈 맞던 너를 잊은 적 없기에

청명의 골짜기
곡우의 빗물 한 줄기 머금은 너를 다시 만나니
그윽한 향으로 품어 안는다

그을린 숨결 너머에도 다시 피어나는 것이 찻잎이라면
내 마음도 너처럼
한나절 향기로 살아도 좋으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소엽 박경숙 시인은 고아高雅하다.
시가 소엽을 닮았는지 소엽이 시를 닮았는지, 사람ㆍ시 모두 단아하다.
 이번 시 또한 그러하다.
한 송이 찻잎을 통해 천년의 시간과 기억, 그리고 인간 존재의 정수를 시적으로 응축해 낸다. 작가는 오랜 세월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찻잎의 생애를 통해, 사람 사이의 침묵과 그리움, 용서와 기다림을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사위진 연기 자락’에서 시작되는 시의 도입은 현실의 고통, 혹은 역사적 아픔의 배경을 연상시키며, ‘차마 너의 안부를 묻지 못했다’는 구절은 인간 사이의 애절하고 깊은 침묵을 말없이 웅변한다.
 이후 ‘붉디붉은 침묵’은 피처럼 선연한 슬픔을, ‘지리산 골짝마다 스미는’ 장면은 자연의 품속까지 침투한 절절한 정서를 보여준다. 이러한 묘사는 단순한 자연의 정경이 아닌, 시대와 운명을 껴안은 생명에 대한 연민과 존중의 감정이다.

시인은 찻잎을 단순한 식물이 아닌 ‘햇살 한 사발에 목욕하던 뽀얀 잎의 숨결’로 그려낸다. 이는 생의 정결함, 존재의 투명함을 드러내며, 대숲 바람과 교감했던 존재로까지 확장시킨다. 찻잎은 더 이상 자연의 일부가 아닌, 작가가 잊지 못할 생명, 나아가 한 존재로 환원된다.

‘청명淸明의 골짜기’와 ‘곡우穀雨의 빗물’은 찻잎이 다시 피어나는 시간의 은유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 만난 너는 여전히 ‘그윽한 향’으로 존재하며, 이는 곧 작가의 가치철학—삶은 향처럼 남는 것, 사라져도 기억으로 피는 것이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특히 마지막 연의 “그을린 숨결 너머에도 다시 피어나는 것이 찻잎이라면 / 내 마음도 너처럼 / 한나절 향기로 살아도 좋으리”는 작품 전체의 미학적 정수를 이룬다. 재와 상처 속에서도 다시 피어나는 존재에 대한 경외와, 짧아도 향기롭게 살고자 하는 삶의 자세가 농축되어 있다.

소엽 박경숙 시인은 ‘찻잎’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맑고 섬세하게 응시한다. 그녀의 시에는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삶의 미학, 소멸보다 향기로 남기를 바라는 영혼의 미의식이 진하게 담겨 있다.
 요컨대, 이 시는 찻잎처럼 살고자 하는, 조용한 한 존재의 순결한 선언이자 천년을 품은 위안의 노래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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