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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과 시문학

천년의 잎

by 청람등불 2025. 4. 10.



 

 

 


                    천년의 잎



                                소엽 박경숙




사위진 연기 자락
산 그늘까지 번지던 날,
차마 너의 안부를 묻지 못했다

붉디붉은 침묵이
지리산 골짝마다 스미는 동안
너만은 살아있기를,
그 바람조차 죄처럼 두 손 모았다

한때,
햇살 한 사발에 목욕하던
뽀얀 잎의 숨결
대숲 바람과 눈 맞던 너를
잊은 적 없기에

청명의 골짜기
곡우의 빗물 한줄기 머금은 너를 다시 만나니
그윽한 향으로 말없이 품어 안는다

그을린 숨결 너머에도
다시 피어나는 것이 찻잎이라면
내 마음도 너처럼
한나절 향기로나 살아도 좋으리






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소엽 박경숙 시인은 자연과 삶을 분리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가만히 길어 올리는 시를 써온 작가이다. 특히 차(茶)에 대한 사랑은 단순한 취향을 넘어 삶의 방식이자 정신적 고요로 이어진다. 그런 면에서 이번 작품 '천년의 잎'은 시인의 내면과 미학이 가장 진실하게 드러난 시 중 하나로 평가할 수 있다.

시인은 지리산 산불이라는 재난 앞에서도 안타까움을 직접 표출하기보다는, ‘찻잎’이라는 메타포를 통해 자연의 회복력과 생명성을 끌어안는다. 잎 하나를 통해 천년의 생명을 떠올리고, 고요한 향 속에서 상처 너머의 회복을 말하는 시인의 시각은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는 유기적 사유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을린 숨결 너머에도/ 다시 피어나는 것이 찻잎이라면’이라는 구절은 시인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드러내준다. 그것은 무너짐이 끝이 아닌, 되살아남과 기다림의 문화를 품은 시선이다.

소엽의 시의 미의식은 절제에 있다. 절규 대신 침묵으로, 외침 대신 향기로 말한다. 이번 시 또한 산불이라는 파괴적 사건을 곧장 묘사하지 않고, 사위진 연기와 붉디붉은 침묵 같은 은유로 대신한다. 그 안에 담긴 ‘차마 안부조차 묻지 못하는’ 마음은 시인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것은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는 이슬과도 같으며, 독자로 시보다 긴 여운을 남긴다.

삶의 철학으로서의 ‘차’는 시인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차를 달이고 마시는 행위는 그에게 고요히 삶을 응시하는 일이자, 영혼의 중심을 세우는 의식이다. 그래서 “한나절 향기로나 살아도 좋으리”라는 마지막 구절은 생의 본질을 향으로 응축해 낸 시인의 미의식이 그대로 응집된 문장이다. 이처럼 소엽의 시는 격정 대신 맑음을, 일시적 감정 대신 지속 가능한 생명의 흐름을 택한다.

요컨대, 이 시는 자연의 생명성과 인간의 내면을 고요하게 껴안는 시인의 삶의 태도, 즉 ‘다시 피어나는 것들에 대한 믿음’으로 요약된다. 그러한 믿음은 절망이 아니라 찻잎처럼 다시 돋아나는 희망이 된다. 박경숙 시인의 시는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깊게 삶의 의미를 우리에게 건넨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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