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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여백, 산
최호 안길근
물속을 헤엄치던 물고기가 육지에 올라 잠시 머물렀다. 오직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로, 도심의 좁은 주택 안을 오가며 마음의 숲을 거두었다. 그러나 결국 숨이 막혔다. 아스팔트 위를 걷다 문득, ‘나는 본래 산사람이었다’는 자각이 뼛속까지 파고들었고,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수년이 흘렀다. 산은 변함없었다. 시간의 주름이 얼굴을 덮을수록, 산은 더욱 부드럽게 등을 내어주었다. 도시에서의 일탈은 짧았고, 그 짧은 틈으로 산은 다시 나를 품었다. 산은 말이 없고, 판단이 없으며, 늘 있는 자리에서 기다려주는 유일한 친구다.
산책길에 들어서면 산은 내게 어깨를 내어주고, 새소리는 속삭이듯 하루를 씻겨준다. 고운 이웃들과 나누는 도시락 한 조각에도, 따뜻한 정이 피어나고 우정이 물들어간다. 도시락은 단순한 음식이 아닌, 자연 속 연대의 상징이다. 각자 삶의 짐을 짊어진 채 모인 이들이, 잠시 짐을 내려놓고 웃음을 터뜨리는 곳. 산은 그런 자리다.
행복은 어쩌면 복잡한 길의 끝이 아니라, 단순한 이 여정의 옆길에 있었다. 자연이 내민 손을 다시 잡으니, 일상의 무게가 산바람에 흩어진다. 이렇듯 산은 나를 끊임없이 비워내게 하고, 다시 채워주는 그릇이다.
이제 내 앞에 남은 세월은 길어야 20년, 짧으면 15년쯤 될까. 그마저도 바람처럼 스칠 것이다. 나이 팔십 넘어 자연과 동행하며, 욕심 없이 하루를 살아낸다 한들, 그 끝은 같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얼마나 자연답게 머무르느냐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산은 뿌리를 내린다. 나는 그 산의 그늘에서 삶의 여백을 배운다. 자연은 나의 스승이고, 산은 나의 벗이며, 그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 바로 이 장심리 산자락이다.
자연은 내게 묻는다. “이제, 네가 진짜 살고 싶은 삶은 무엇이냐?”
나는 대답한다. “이렇게, 새벽을 깨우며 조용히 웃고 싶은 삶.”
– 장심리산자락에서
자연인, 새벽을 깨우는 남자
안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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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청람 김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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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자연 속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찾은 한 사람의 고백이며, 인간 존재의 본질과 조화로운 삶의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도시의 번잡함 속에서 잠시 머물렀던 작가는 결국 숨 막히는 일상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리, 산으로 돌아온다. 이는 단순한 귀향이 아닌, 자아의 회복이며 존재의 본질로의 회귀이다.
안최호 작가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에서 인간과 자연의 수직적 관계가 아닌, 평등하고 우정 어린 관계를 지향한다. 산은 말없이 기다려주는 존재로 등장하며, 인간의 슬픔과 피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그릇으로 표현된다. 이는 자연을 스승이자 벗으로 여기는 그의 미의식과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물고기가 물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듯, 작가는 자연이라는 본래의 자리에 머물며, 삶의 여백을 배운다. 여기서 '여백'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존재를 온전히 채우는 공간이자 성찰의 시간이다.
도시락 한 조각에 담긴 따뜻한 정, 함께 걷는 이웃들의 우정,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일상의 무게 등은 모두 자연 속에서 피어나는 소소한 행복의 조각들이며, 이는 곧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에서 벗어난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찬가로 읽힌다.
또한 안최호 작가는 남은 생의 유한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얼마나 오래가 아니라 얼마나 자연답게 머무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생의 질과 존재의 방식에 대한 깊은 통찰이며, 죽음을 두려움이 아닌 순리로 받아들이는 자연주의적 생사관을 드러낸다.
요컨대, 이 글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지향하며, 단순함 속에서 피어나는 충만한 삶을 노래한다. 이는 소유와 성취 중심의 현대 사회에 던지는 조용한 질문이자, 참된 삶의 자리를 돌아보게 하는 깊은 울림이다.
작가 안최호는 산자락에서의 소박한 일상 속에 진정한 미와 가치를 발견하며, 이를 통해 독자에게도 삶의 본질을 다시 바라보게 한다.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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