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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미학
— 사라짐이 남기는 빛
김왕식
삶이란 언젠가 끝나는 연극이다. 누구도 대본을 완전히 알 수 없고, 언제 무대의 막이 내릴지도 모른다. 그 불확실성과 덧없음이야말로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그 끝, 죽음을 말하는 데 서툴다. 죽음은 삶의 그림자이며, 모든 존재의 귀결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것을 입에 올리기를 꺼린다. 하지만 죽음을 외면한 채 삶을 말하는 것은, 마치 그림자의 존재를 부정한 채 빛을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죽음은 단순한 소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존재의 가장 완전한 형태로의 회귀다. 찬란한 단풍잎이 낙엽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듯, 꽃이 지고 난 뒤 열매를 남기듯, 죽음은 사라짐으로써 남는 것들을 완성한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앞두고야 비로소 삶의 표면 아래 있던 의미들이 떠오른다. 떠나는 이의 말 한마디, 마지막 숨결 속에서 우리는 가장 진실한 인간을 만난다.
죽음은 그 자체로 절정의 미학을 품고 있다. 생은 늘 갈망과 충돌 속에 있다. 하지만 죽음은 고요하고 단단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 삶보다 더 많은 말을 건넨다. 바로 그 침묵의 깊이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용서를, 그리고 존재의 비의를 더 또렷하게 바라본다. 삶이 시끄러운 희극이라면, 죽음은 무대의 마지막 조명처럼 정적 속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시이다.
삶이 직선이라면, 죽음은 마침표다. 그러나 그 마침표는 끝이 아니라 여운이다. 잘 쓰인 문장의 끝이 여운을 남기듯, 잘 살아낸 삶의 끝에는 아름다운 고요가 깃든다. 이 고요 속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용서하고, 타인을 이해하며, 존재의 본질과 마주한다. 죽음은 누군가를 앗아가지만, 그 빈자리를 통해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예술은 죽음과 끊임없이 교류해 왔다. 고흐의 붓질, 쇼팽의 음표, 김소월의 시구는 모두 언젠가 끝날 것을 알기에 더욱 치열했고, 그 치열함은 곧 죽음과의 대화였다. 아름다움은 영원의 반대편에서 피어난다. 꽃이 영원히 피어 있다면 누가 감탄하겠는가. 스러짐을 알기에 우리는 그 찰나의 빛을 더욱 가슴에 새긴다.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일부이다. 삶이 빛이라면 죽음은 그림자이고, 삶이 말이라면 죽음은 쉼표이다. 그 쉼표가 있어 문장은 완성되고, 그 그림자가 있어 빛은 더 밝아진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평등하고, 가장 자연스러운 귀향이다.
그러니 죽음을 생각하되 침울하지 말고, 사라짐을 바라보되 허무하지 말자. 죽음은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마지막 예술이자, 이 생의 덧없음이 쓴 가장 진실한 시다. 그 시의 마지막 행은 이렇게 속삭인다.
“나는 사라지지만, 너는 기억하리라. 그리고 그 기억이 또 다른 삶이 되리라.”
ㅡ 청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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