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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람과 시문학

사월의 살풀이

by 청람등불 2025. 4. 6.



 

 

창 밖

사월의 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사월의 살풀이





창밖, 비는
유리창에 남긴 오래된 입맞춤처럼
가늘게, 그러나 깊이 흘러내린다

황사의 외투를 입은 나무는
잊혔던 이름 하나를 속삭이듯
연둣빛 혀끝으로 빛을 어루만진다

사월을 잔인하다 했던가
꽃은 피기 전 가장 적막하고
씨앗은 깨어나기 전 가장 단단하다

비는 허물이다
말라붙은 침묵의 껍질이
한 겹씩, 조용히 벗겨지는 오후

대지는 붉은 숨을 되찾고
뿌리마다 잠든 맥박이
먼 곳의 봄을 꿈틀이며 데려온다

이 봄비는 문지방을 넘는 정령
묻힌 것들을 불러 세우고
흙 속 말들도 줄지어 일어선다

너는 들었는가
젖은 잎새 틈에서 피어나는
말 없는 환희, 울음의 전언

사월이여
너는 흠뻑 젖은 기도
이 생을 깨우는, 슬픈 축복이다


ㅡ 청람

 

 

 

자작시 해설

 


'사월의 살풀이'는 ‘사월’이라는 계절의 이미지에 인간 내면의 정화와 생명의 부활을 결합하여 깊은 상징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전통적인 살풀이춤에서 죽음의 기운을 떨쳐내듯, 이 시는 봄비를 통해 굳은 생을 씻어내고 새로 깨어나는 ‘삶의 맥박’을 노래한다.

1
 창밖, 비는
유리창에 남긴 오래된 입맞춤처럼
가늘게, 그러나 깊이 흘러내린다

‘창밖’이라는 프레임은 내면과 외부 세계의 경계를 설정한다. 봄비는 유리창에 스민 옛 입맞춤 같아, 사랑과 이별, 그리움이 응축된 시간의 자취로 느껴진다. 비의 가느다란 선은 감정을 자극하며 조용히 깊숙이 스며든다.

2

황사의 외투를 입은 나무는
잊혔던 이름 하나를 속삭이듯
연둣빛 혀끝으로 빛을 어루만진다

황사로 흐릿해진 세계 속에서도 생명은 움직인다. ‘연둣빛 혀끝’은 새싹의 생장을 혀에 비유하며, 생명의 속삭임 같은 조심스러운 부활을 묘사한다. 잊힌 이름은 인간 내면의 기억이나 정체성, 또는 희망일 수 있다.

3

사월을 잔인하다 했던가
꽃은 피기 전 가장 적막하고
씨앗은 깨어나기 전 가장 단단하다

T. S. 엘리엇의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을 인용하며, 생명의 탄생 직전이야말로 가장 고요하고도 견고한 시기임을 말한다. 진정한 변화는 정적 속에서 오며, 이 적막은 시련을 견디는 시간이다.

 

4

비는 허물이다
말라붙은 침묵의 껍질이
한 겹씩, 조용히 벗겨지는 오후

봄비는 단순한 날씨가 아니라 ‘허물’로 상징된다. 침묵의 껍질이 벗겨지듯, 굳었던 마음과 시간의 껍데기를 하나씩 조용히 벗긴다. ‘조용히’라는 부사는 시 전체의 톤을 부드럽고 섬세하게 만든다.

5

대지는 붉은 숨을 되찾고
뿌리마다 잠든 맥박이
먼 곳의 봄을 꿈틀이며 데려온다

봄비로 인해 생명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붉은 숨’은 피와 생명의 상징이다. 시인은 대지를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다루며, 뿌리의 맥박은 본능적인 생명의 회복력을 강조한다.

 

6

이 봄비는 문지방을 넘는 정령
묻힌 것들을 불러 세우고
흙 속 말들도 줄지어 일어선다

비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영혼처럼 묘사된다. ‘문지방’은 경계의 상징이며, 그것을 넘는 ‘정령’은 생과 사, 침묵과 언어 사이를 오간다. 흙 속 말들이 깨어나는 모습은 생명의 소생뿐 아니라 억눌렸던 진실의 귀환이다.

 

7

너는 들었는가
젖은 잎새 틈에서 피어나는
말 없는 환희, 울음의 전언

화자는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건다. 봄의 환희는 소리 없는 울음 속에 담겨 있고, 그 울음은 비로소 전언이 된다. 이는 감정의 해방이며 동시에 깨달음의 순간이다.

8

사월이여
너는 흠뻑 젖은 기도
이 생을 깨우는, 슬픈 축복이다

 

마지막 연은 시 전체를 응축한다. ‘사월’은 자연이 아니라, 기도이며, 눈물이고, 존재를 깨우는 축복이다. ‘슬픈 축복’은 고통과 치유,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복합 감정을 함축한다.

요컨대, '사월의 살풀이'는 시인의 내면적 성찰과 자연에 대한 직관을 유기적으로 엮은 작품이다. 각 연은 감각적 이미지와 상징으로 구성되어 있어, 봄이라는 계절을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닌 ‘정화와 부활의 시간’으로 재해석한다. 이 시는 말보다 ‘말 없는 환희’를 강조하며, 침묵 속에 숨은 생명의 목소리를 듣게 한다. 시적 언어는 절제되어 있으나 깊고 섬세하며, 정제된 감정이 내면의 울림으로 전해진다. 전통적 ‘살풀이’의 개념을 빌려 사월의 고통과 회복, 기도와 눈물을 동시에 끌어안은 이 시는,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현대적 영가이다.

 

 

 청람